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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는 분명 같은 금액이 있는데 장을 보고 돌아오면 살 수 있는 물건이 줄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돈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그 돈으로 유지할 수 있는 생활의 범위가 달라진 것입니다.

잔액은 그대로인데 구매력은 줄어듭니다
가상의 장바구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해 10만 원으로 샀던 식품과 생필품을 같은 수량으로 담았는데 올해는 10만 5,000원이 필요하다면, 이 장바구니의 가격은 5% 오른 셈입니다. 같은 물건을 사려면 돈을 더 내거나, 예산을 유지하려면 수량이나 품목을 줄여야 합니다. 물가가 돈의 가치를 낮춘다는 말은 이렇게 살 수 있는 양, 즉 구매력이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다만 특정 채소 한 품목이 비싸졌다고 경제 전체의 돈 가치가 그만큼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물가는 여러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종합해서 봅니다. 지출 비중이 큰 항목에는 더 큰 가중치를 두므로 모든 가격의 상승률을 단순히 더해 평균 낸 값과도 다릅니다.
물가가 5% 오르면 돈의 구매력도 정확히 5% 줄어들까요? 계산은 조금 다릅니다. 전반적인 가격이 5% 높아졌다는 가정에서, 올해의 100만 원을 지난해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100만 원÷1.05’인 약 95만 2,381원입니다. 구매력 감소율은 약 4.76%입니다. 가격은 예전 금액을 기준으로 오르고, 구매력은 오른 가격으로 나눠 구하기 때문에 차이가 생깁니다.
이 변화는 시간이 쌓이면 커집니다. 물가가 해마다 3%씩 오른다고 가정하면 지금 100만 원인 소비 묶음은 5년 뒤 약 115만 9,274원이 됩니다. 이자 없이 보관한 100만 원으로는 같은 묶음의 약 86.3%만 살 수 있습니다. 계좌 잔액만 확인하면 보이지 않는 손실입니다.
물가상승률이 낮아져도 생활비는 오릅니다
물가상승률이 5%에서 2%로 내려갔다는 소식은 가격이 예전으로 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르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의미입니다. 가격 수준과 가격이 변하는 속도를 구분해야 뉴스와 장바구니 사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 200만 원이던 생활비가 첫해 5% 올라 210만 원이 됐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듬해 동일한 소비 묶음의 가격이 2% 오르면 필요한 돈은 214만 2,000원입니다. 상승률은 낮아졌지만 처음보다 14만 2,000원이 더 듭니다. 두 해의 누적 상승률도 단순 합계인 7%가 아니라 7.1%입니다. 두 번째 인상이 이미 오른 가격 위에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공식 물가와 우리 집 부담이 다른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가상의 가계가 소비지출의 40%를 식비에 쓰고 식비가 8%, 나머지 지출의 가격이 2% 올랐다면, 같은 소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은 약 4.4% 늘어납니다. 식비 비중이 20%인 가계라면 같은 조건에서 약 3.2%입니다. 같은 가격 변화를 겪어도 많이 쓰는 항목이 무엇인지에 따라 부담이 달라집니다.
월급과 예금이자는 물가를 반영해 봅니다
월급이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생활이 나아졌다고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세후 월급이 300만 원에서 309만 원으로 3% 늘었는데 내 소비 묶음의 가격이 5% 올랐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올해 월급을 지난해 구매력으로 바꾸면 ‘309만 원÷1.05’인 약 294만 2,857원입니다. 받는 돈은 9만 원 늘었지만 살 수 있는 양은 약 1.9% 줄어든 셈입니다.
예금도 같은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원금 1,000만 원에 세금을 뺀 이자가 30만 원 붙어 1,030만 원이 됐더라도, 같은 기간 물가가 4% 올랐다면 과거 구매력으로는 약 990만 3,846원입니다. 명목 잔액은 증가했지만 실질 구매력은 약 0.96% 감소합니다. 단순히 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빼는 방법은 대략적인 비교이며, 정확한 비율은 ‘1.03÷1.04-1’로 계산합니다.
그렇다고 구매력 감소를 피하려고 생활비와 비상금까지 가격 변동이 큰 자산에 넣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까운 시일에 쓸 돈은 필요한 날짜에 꺼낼 수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물가를 고려하는 목적은 무조건 높은 수익을 좇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필요한 금액을 현실적으로 잡는 데 있습니다.
생활비를 점검할 때는 총지출 증가를 모두 물가 탓으로 돌리지 말고 가격과 수량을 나눠 보세요. 같은 식재료를 같은 양만큼 샀는지, 외식 횟수나 가족 수가 늘었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득이 얼마나 늘어야 기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지, 어디에서 소비를 조정할 수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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